창세기전3 파트2를 이제서야 클리어 하면서..

창세기 매니아지만..

창세기전3는 이제서야 완결을 봤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창3 파트1이 발매됬을때 가장 먼저 달려가서 정품을 품에안고 플레이했는데..

창세기전이 다 그랬지만 난이도가..난이도가..더군다나 나는 왜 용병 시스템이 그렇게 적응이 안되던지..

거기에 결정적으로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1년뒤에 스크래칭으로 빛나는 상태로 되돌아와 아예 관둬버렸다는..그러면서 자연히 파트2도 관심끄게 됬었고..

어쩌다 구해서 이제야 엔딩을 봤는데..역시 창세기전은 창세기전이다..ㅋ

파트2도 파트1처럼 막판에 좀 지루해지는 감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스토리가 괜찮으니까..

전반적으로는 창세기전3의 스토리 전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만한 여지가 많은것도 사실인 듯 싶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허점으로 짚힌 부분이 흑태자가 만든 아수라가 어떻게 이렇게 큰 의미로 확장되냐..웃긴다..라는 부분이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흑태자가 아수라를 만들었다는 관점을 버리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미래 아르케에 존재하던 '영혼의 검'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검의 발현자가 되었던 과거 안타리아에서 온 살라딘.

살라딘은 그 영혼의 검으로 자신의 영자를 흡수시키면서, 세라자드에게 자신의 달을 주고 그 자신은 앙그라마이뉴에 의해 영자상태로 돌아간다.

물론 영혼의 검이 세라자드의 영자와 함께 달의 내부로 들어가면서 다시금 베라모드라는 존재안에 내재되지만, 엔딩 마지막에 영혼의 검이 과거의 안타리아로 되돌아가 테라모핑을 하며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 영혼의 검에 존재하던 살라딘의 영자 일부분도 '스펜터마이뉴'에 의해 방출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흑태자가 살라딘의 또다른 현신이라는 가정이 틀리진 않다.

그리고 살라딘의 또다른 현신이였던 흑태자가 자신의 왼팔을 그리마화 시키면서 '아수라'라는 검을 만들어내는것도 내용에 어긋나는것이 아니다. 미래의 영혼의 검 소유자였던 살라딘이 다시금 과거에서 '아수라'라는 검의 시작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것은 다시금 앙그라마이뉴를 각성시켜 미래의 아르케로 살라딘과 세라자드 즉 '베라모드'를 보내는 계기가 된다.

파트2 엔딩 마지막에 보면 세라자드의 독백에 이런 부분이 있다.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것처럼, 이젠 내가 당신에게 줄 차례입니다.  .... 적어도 내 안에 성장하는 나의 일부는 그 말의 의미를 가슴아프게 실감하겠지요..'

미래 영혼의 검이라 불리던 아수라로 베라모드를 죽이는 흑태자, 그에 의해 베라모드에 존재하던 또다른 살라딘의 영자와 세라자드의 영자는 '코어'로 되돌아가 환생을 기다리며, 흑태자 역시 아스모데우스의 운용으로 인해 기력을 다하고 이올린에게 죽임을 당한다.

어쩌면 이것도 데이모스의 계산이 아니였을까..라고 생각하는것은 좀 오바일수도..ㅋ

여하튼..그렇게 또다른 운명의 살라딘과 세라자드는 환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살라딘도 세라자드도 아니다. 살라딘도 아니고 세라자드도 아닌 존재로 다시한번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짊어져야 할 슬픈 운명, 즉 베라모드로써의 운명은 다시금 시작된다..

라는 의미로 마지막에 그 젊은 남녀 커플이 등장한게 아닐까..하는게 내 생각..ㅋ

소프트맥스 측에서 이미 살라딘과 흑태자는 동일선상에 있는게 아니라고 발표를 했다고 하지만, 아직 난 확실한 입증을 가질만한 자료를 접하질 않았기에..더구나 게임이야 뭐 자기가 생각하는것이 중요한것 아니겠나..


뫼비우스의 원리는 과거가 과거가 아니고 미래가 미래가 아닌 것.
영혼의 검이라는 존재를 가운데에 두고 끝없이 돌고도는 운명의 수레바퀴.
미래의 영혼의 검은 과거의 아수라의 시작이며, 과거 안타리아가 겪는 운명은 미래 아르케가 겪는 운명의 시작을 가져온다.

시작이 시작이 아니며 결말이 결말이 아닌,
앞선 미래가 지난 과거의 시작을 가져오고, 지난 과거가 앞선 미래의 결말을 가져다주는..

사실 이런 부분 중에선 과거가 미래의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부분에 있어선 많은 접근이 없긴하다..

어쨌든..창세기전의 대략적인 개인적인 이해는 이 정도라고 할까..ㅋ

by opimous | 2009/02/14 02:57 | Talkative | 트랙백 | 덧글(0)

[E.그리그]페르귄트 모음곡 중 솔베이그의 노래


아침에 일어나니 밖이 어둡다.

음..내가 제일 싫어하는 비오고 흐린 우중충한 날이구나..라는 느낌이 팍팍 꽂힌다..

이럴땐 크게 두가지의 경우..

신나는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아예 축 가라앉는 음악을 듣거나..인데..

오늘은 그냥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으로..

뭐가 좋을까..하다가 결국엔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으로 결정했다..ㅋ

by opimous | 2009/02/07 13:41 | Classical | 트랙백 | 덧글(0)

펠라이니 얘 좀 대박이네.


요샌 괜히 바쁜척 하느라 EPL을 예전만큼 찾아서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요새 펠라이니가 에버튼에서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언제 한번 봐야겠다...싶다가 에버튼 경기를 한 3경기 구해서 봤는데..

3경기만 보고서 전체적인 판단을 할 순 없지만 일단은..쫌 잘하는듯..

일단 피지컬부터가 대박이고..처음에 보고선..워..무슨 떡대가 저렇게 크냐 싶었으니까..ㅋ

하지만..축구는 떡대로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신체조건으로만 판단할 순 없고..맨유랑 1:1로 비겼던 경기를 보는데 전반전 내내 펠라이니가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게 딱 그거였다.

뭐 이리 움직이는게 어수선하고, 따로 노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그. 런. 데

후반 들어가니까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플레이가 바뀌지? -_-

후반들어서는 보다 집중적인 보란치 역할을 맡더니 중앙 제공권을 그냥 홀라당 드셔버리시더라는..

아무래도 긱스와 플레쳐가 지키는 중앙에서 제공권을 기대하는건 좀 무리이기도 했지만..그래도 후반에 펠라이니가 유일하게 헤딩 컷팅을 당한건 역쉬나 완소 비디치!

거기에다가 뭐 팀에게 동점골까지 안겨줬으니 이건 뭐..확실히 인상적인 모습이였다..


그다음에 또다시 맨유 올드트래포드에서의 경기.

이 경기는 에버튼이 뭐..개인적으론 전문적인 공격수가 없는 4-6-0으로 보이는 포메이션을 들고와서..처음부터 수비적인 역할을 잘 지켜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팀 카힐이 공격수로 나와있길래 물음표만 연발했던 한 사람)


패스 차단률도 꽤나 좋고,  패스차단하고나서 어느순간에 좌측면에서 비디치랑 맞짱뜨고있는걸보니..일단 활동반경도 넓은것 같다.

그리고 난..테베스가 몸싸움에서 나자빠지는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지라..(신기했다고 할까..)

펠라이니를 보면서 로이킨의 삘이 풍겨오는게..성격도 있어보이시고 태클이나 반칙도 거침없으시고..스탯보니까 카드수집도 취미이신것 같고..여러모로 보면 로이킨 스타일 같은데..키가 커서 무효..(-_-)

맨유에 왔으면 싶은데..꽤나 비싼 돈을 줘야할게 분명하고..맨유 중원이 아쉬운 상태도 아니니까..
게다가 이 경기에서도 보여줬지만 요새 캐릭이 그냥 캐릭이 아니다..-0-


그에 반해서 플레쳐는..참..못하는 선수는 아닌데..기복을 타기시작하면 대책이 없다..그러고보니 펠라이니 이 선수는 기복이 어느정도나 되는질 잘 모르겠다..경기를 아직 얼마 안봐서..혹시 아시는 분 있으시면..알려주시면 감사..^^;


PS

맨유와의 두 경기에선 펠라이니만큼이나 돋보였던건 아르테타, 모예스 감독은 블랙번 시절 마크휴즈 감독 만큼이나 알짜배기 선수들을 적절하게 잘 데려오는 듯 싶다. 갱생도 잘 시키고..기억이 정확하다면 처음 아르테타가 소시에다드에서 에버튼으로 임대왔을때 스페인리그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뛰는 선수는 얼마 되지 않았었는데..그만한 위험부담이 있었음에도 그 다음 시즌에 완전이적까지 시키면서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으니까...결과론적이지만 아르테타를 떠나보낸 소시에다드는 입맛 다실만하겠다. 하긴 그때 소시에다드가 아르테타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안해도 될 상황이긴 했지만..

게다가 여담으로..아주 옛날일이 되기는 했지만..하워드 선수 선방 날릴때마다 아주 그냥 가슴이 쓰리다..ㅡㅜ

맨유에선 왜 그렇게 못한거예요? ..초반엔 반짝 날으셨지만..그 다음엔..참...ㅎㄷㄷ..캐롤과 함께 삽질의 쌍두마차를 선보이시던 분이..

이러기예염? ㅋ;;;

아..그리고..사견이긴 한데..이번 경기 에버튼처럼 수비적인 플레이에 능하고 조직력이 견고한 팀에게는 지난 시즌의 땅꼬마 투톱(루니-테베즈)가 훨씬 효과적으로 보이는데..(그렇다고 타겟맨으로써 베르바의 효율성이나 역할을 부정하는것은 아니다^^:;..하긴 베르바의 경우는 완전 타겟맨이라고 정의내리기도 애매한 경우이기는 하다...)

지금 맨유는 선수보강이 아쉬울게 없는 스쿼드이긴 해도..그래도 보강한다면 4번째 공격옵션이 어느정도 수준이 되는 선수로 충당했으면 싶은게 바램이지만...이것도 뭐..다음시즌 캠벨이 돌아온다면 아마도 캠벨이 맡게되지 싶다..

그러고보니까..켐벨은 어떠나 싶네..토튼햄 경기를 또 뒤져봐야겠구나..ㅋ^^;;;

by opimous | 2009/02/07 02:26 | Let's Football | 트랙백 | 덧글(9)

[H.베를리오즈]환상교향곡 Op14. 2악장


낭만주의 초기의 대표적 표제음악 대가

고정악상을 처음으로 생각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데 '고정악상'이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의 곡의 악장마다 일관된 주제를 가진 모티브가 악장마다 조금씩 변형해가면서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표현하면서도 대상의 심적인 변화를 음악의 선율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까..

가장 대표적인 곡이 환상교향곡...5악장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고정악상이 각 악장마다 조금씩 변형해가면서 베를리오즈의 심리적 변화를 대변해준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특히나 이 환상 교향곡이라는 작품 자체가 자신이 짝사랑 했던 여배우 스미드슨이 결국 다른 사람과 열애중이라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며 5악장 '마녀의 밤연회'에서 그녀를 마녀로 생각하고 작곡할만큼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성격의 것이라..고정악상은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온다.
 
원래는 의학도였던 그가 파리에서 처음으로 음악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해부학 실습 당시 질겁을하고 도망쳐 나오면서 그는 의학도를 포기하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는데, 이쯤되면 예상하겠지만, 그는 음악원생이면서도 피아노조차 연주하지 못하는 조금은 핀트가 안맞는 환경적 위치에 놓여져 있었다. 아주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에 따르면 플룻과 기타는 어릴적에 배운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의 20대는 열정적인 짝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싶다.
앞서 이야기한 연극배우 스미드슨에 대한 짝사랑은 그녀가 연극에서 상대배우에게 안기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면서 뛰쳐나갔다고 할 정도니까...

베를리오즈의 친구로는 당시 유명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 펠릭스 멘델스존, 프레데렉 쇼팽이 있다.
그들은 베를리오즈가 이 시기에 자살을 결심할까 노심초사 했다고 한다. 뭐..이 사실은 베를리오즈가 그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여린 성격이였던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오케스트레이션의 대가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을만큼 환상교향곡은 각 악기의 음색을 최고로 이끌어낸다.

사실 환상교향곡을 아무생각 없이 들으면(아무 생각없이 들어도 좋은 곡이지만..) 한계가 있지 싶다.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을 알고나서 들어야 각 악기가 생동감있게 튀어오르는 부분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고..정말 제대로 듣고싶으면 고정악상을 찾아가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곡이다..하긴..이런건 너무 어렵게 듣는것 같아서 싫긴하다..ㅋ

어쨌든.,.그도 다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풍요로운 삶을 살진 못했다.
악단과의 마찰, 극심한 경제적 빈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래도 그의 음악은 유럽 전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파리만 빼고...

파리에서 베를리오즈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부터이다.

이 쯤 되면 성서에서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이 얼추 들어맞는 듯도 싶은..베를리오즈가 예언자는 아니지만..^^;ㅋ



by opimous | 2009/02/06 23:07 | Classical | 트랙백 | 덧글(0)

바그너와 브람스의 대립


바그너주의가 고전주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서 옮겨놓습니다.

출처는 네이버 지식in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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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낭만파)의 상반된 예술관을 갖고 대립한 위대했던 독일인 작곡가 브람스와 바그너.
예술의 시대적 혁신을 화두로 삼았던 독일 민족주의자 바그너와 인류 보편의 예술을 추구했던 브람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반대의 존재였다. 바그너는 혁명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데 반해, 브람스는 (신)고전파였고 추상적 형식을 주로 다루었기에 오페라는 물론이고 표제음악조차 쓰지 않았다.


* 바그너(Wagner 1813∼1883)와 브람스(Brahms 1833∼1897)는 같은 독일사람이나 그 작풍이 매우 대조적이다. 바그너가 독일적인데 대해 브람스는 보다 헝가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바그너가 극적인데 비하여 브람스는 서정적이다. 바그너가 진보적이라면 브람스는 보수적이었다. 그 당시 「바그네리즘」이란 선풍이 국내작곡가에게는 물론 전세계의 악단을 휩쓸고 있을 때에 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브람스뿐이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매우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바그너와는 반대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으며 실내악곡을 주로 썼던 것이며 절대음악의 길로만 매진했던 것뿐이다.

바그너는 작곡기법상으로 당대와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고 반면에 브람스는 주옥같은 작품만을 남겨 놓았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근대 오페라 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일컫어지는 <바그너>(Wihelm Richard Wagner, 1813~1883)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기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오페라가 오락물로 전락한 것을 비판하며, 문화개혁을- 특히 독일정신의 회복을-이룰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를 연구하였다. 기존 체제의 전복을 목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가담했을 정도로 강한 이념을 가진 그는 그의 새로운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에 대한 개념과 이것의 실제적 적용인 <음악극>(Musikdrama)을 통해 그것을 반영하고자 했다. 그 개념과 음악극에 쓰인 기법들은 특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음악가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의 창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영향력은 그의 이념과 작품에 대한 논란과 함께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독일의 오페라는 바그너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를 얻게 되었는데, 그 새로운 형식을 일반 오페라와 구별할 때 이렇게 부른다. 바그너는 종래의 오페라형식에 반대하여 '전체예술작품'을 제창하고, 오페라는 단순히 음악·연극·조형예술 등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실현하는 데 있어 다른 모든 예술이 이를 거들어주어야 하며 그 것이 참된 예술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대본의 가치가 존중되고 극적 내용이 강한 것, 고도의 사상성을 가진 것이 선택되었다. 또 종래의 아리아 편중의 번호오페라의 방법을 버리고 음악 전체가 단락감을 피해 무한히 계속되는 무한선율양식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라이트모티프[시도동기]가 쓰이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음악적 동기를 단어와 같이 일정한 의미를 갖게 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음악이 항상 극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진행된다. 이 밖에 가곡풍의 멜로디나 레치타티보는 배제되고 대사의 억양을 음악의 흐름 속에 이입시키는 방법에 의해 음악적 표현능력과 언어를 융합시키려고 하였다. 또 관현악의 표현 범위도 확대되고 편성도 커지는 경향이 있다. 바그너 이후, R.슈트라우스나 H.피츠너의 오페라도 이렇게 불리는 일이 많다.



* 브람스는 바그너(Richard Wagner)와 더불어 후기 낭만파의 커다란 흔적을 남기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바그너가 사회 운동가로서 사회개혁을 통하여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스위스에서의 망명생활을 거치기도 하며 평론가로서도 이름을 널리 떨쳤는데 반하여, 브람스는 순수한 음악가로서 자신의 일만 묵묵히 수행하여 왔다. 브람스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이후의 힘의 음악가, 열정의 음악가라 표현하는 것도 자신의 일생을 외고집으로 주장하며 소일한 것에 비추어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흔히 후기 낭만파에 있어서 바그너와 자주 비교가 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은 후기 낭만파의 양대 거봉이었던 만큼 개성도 뚜렷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서로 상대방을 얕잡아 보는 풍조가 성행하였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브람스의 제자들이 식당에 앉아 있을 때 바그너 추종자들이 식사를 하러 들어오면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식당을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낭만주의도 익을 대로 익어갔던 시기였던만큼 바그너파는 브람스를 가리켜“시대의 조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태고의 유물”이라고 혹평했다. 나이 40이 지나 교향곡을 쓰기 시작한 브람스를 보고 바그너는“교향곡은 베토벤에서 다 끝났는데 무슨 놈의 교향곡이냐?”고 비웃기도 했지만 브람스가 쓴 네 개의 교향곡은 오늘날 베토벤의 교향곡들과 동열의, 아니 때로는 그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다.


* 바그너의 철학

바그너의 예술에 있어서 이 '말하는 침묵' sounding silence과 실제로 나타나는 사건과의 관계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개체의 세계에 있어서 내적 의지와 외적 현상과의 관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그 자신 변전 transition의 예술이야말로 그가 소유한 최선의, 그리고 가장 심오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말했다. "이해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 이해는 변전의 가장 직접적이고 어쩔 수 없는 '동기화' Motivation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전 예술 작품은 이 '동기화'를 통하여 자연발생적이며 필수적인 감정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구성 된다."



* '개혁'의 바그너에 대항한 브람스의 '보수'

일반적으로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는 그들의 관계는 본인들의 의식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립 양상이다. 실제로 브람스는 바그너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오페라 등을 잘 보러 다녔다. 다만 창작 기법상 서로 다른 문제를 추구했기 때문에 내면적으로 바그너를 의식했던 것이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천재는 있어도, 일찍이 두 사람의 천재가 동 시대를 살면서 서로의 재능을 불태웠던 일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 켜 볼 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브람스보다 20살이나 연상인 리하르트바그너(RichardWagner,1813~1883)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연극배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브레스덴과 바이로이트로 이주해 활약하면서 평생을 음악극 작곡에 몰두하다가 아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숙명적인 겨룸을 했어야 했는지는 그들의 음악노선을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브람스와 바그너가 활약하던 시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고전주의가 사그러들면서, 무대가 독일로 옮겨져 낭만주의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슈로 등장한 것이 '베토벤의 뒤를 이을 음악가'였고, 이 때 등장한 음악가들이 베버와 멘델스존, 슈만 등이었으나 이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갔던 것이다. 독일의 음악계가 이렇듯 스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의 음악계에 나타난 이들이 바로 브람스와 바그너였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가 주장하는 노선마저 극명하게 달랐다. 바그너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를 연, 베버의 뒤를 이어 독일 국민 오페라를 창출해낸 '개혁파' 작곡가였다면, 브람스는 앞 세대의 작곡가인 바하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같은 선배 음악인들의 노선을 철저히 뒤따라간 '보수파'였다. 작품 양식에 있어서도 브람스는 악곡을 형식 또는 소재 별로 구분하여 각각 독립된 가운데 완벽성을 기했으나, 바그너는 음악의 모든 장르와 양식을 다만 종합 예술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데 비해, 브람스는 한 편의 오페라도 남기지 않았고, 브람스가 작곡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천부적인 '작곡가형'이었다면, 바그너는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팔방 미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바그너를 후원했던 인물이 리스트였지만, 브람스는 슈만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고, 영향을 받은 음악인의 성향에 두 사람이 굳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가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그토록 멀리 갈라진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 브람스를 혹평했던 바그너

바그너가 1863년 그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무렵의 일이다. 브람스는 이때 바그너가 살았던 하디크가세 72번지에서 그의 조수처럼 사보를 돕고 있었다. 그럴 즈음 브람스에게, 당시 이미 거장이었던 바그너 앞에서 헨델의 변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연주를 들은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이에 고무된 브람스는 역시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앞으로 없을 것' 이라며 흥분하게 된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브람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바그너 앞에서 두 번째의 연주를 가지게 되면서 그만 깨지게 된다 .예상과 달리 바그너가 브람스를 '전통 속에 갇힌 인물'이라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후에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브람스를 '바하나 작곡해야 할 인물'로 혹평하고 있다. 이 사건은 브람스로 하여금 '바그너의 환상'을 깨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후 죽을 때까지 바그너를 '증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바그너가 왜 그처럼 표변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 문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 여성 편력에 있어선 같았던 두 숙적


당시 브람스는 비인의 최대 평론가인 한슬릭에게 바그너의 여자문제를 폭로해버렸고, 이 때문에 바그너는 한슬릭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슬릭으로부터 수세에 몰린 바그너는 이 때문에 비인에서 공연하기로 77회나 연습을 거듭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바그너가 공격을 받았던 여자 문제란, 그에게 많은 돈을 꿔주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 여인에게 연정의 뜻이 담긴 각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각서가 그만 브람스에게 흘러 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브람스는 비인에서 모짜르트, 슈베르트, 베토벤등의 자필 서한을 비롯한 음악인들의 악보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바그너의 연서가 브람스에게 흘러 들어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각서를 브람스가 자신의 후견인처럼 활약하고 있는 한슬릭에게 공개했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고, 더구나 그 시기가 바그너가 한스 폰 뷜로우의 부인이었던 리스트의 둘째 달 코지마에게 아이를 갖게 한 때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바그너에 대한 브람스의 폭로 사건은, 하필 '니벨룽겐의 반지'의 성공으로 떠들썩한 유럽 음악계에 찬물을 끼얹은 일대 사건이었다. 졸지에 허를 찔린 바그너는 이에 질세라 브람스의 음악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낭만주의 시대에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한 것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끈질기게 헐뜯으면서, 그의 음악을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깡깡이쟁이로 쏘다닐 것이다'라고 힐난했다.



* 유럽 음악계의 양분화

드러내놓고 브람스의 험담을 해대는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침묵으로 고민만을 했다. 그에 비해 바그너는 다혈질에다가 오만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두 사람의 독설과 공방은 마침내 유럽의 음악계가 양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브람스의 지지파와 바그너의 지지파로 나뉘어진 것이다.
브람스의 지지파는 슈만 부부를 비롯해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긴 한스 폰 뷜로우, 당대 최대의 바이올리니윱 요아힘등이었고, 바그너 쪽으로는 리스트를 필두로 니체, 쇼펜하워, 마이어베르등의 인물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브람스의 지지파인 한스 폰 뷔로우가 그의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기기 전까지는 바그너의 숭배자였다는 사실이다.
바그너와 브람스는 여자 문제에서도 격돌하게 되는데, 베젠종크 부인과의 사랑이 그것이었다. 두 번의 결혼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인을 가까이했던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여인들을 사랑은 했으나 결혼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이런 브람스를 두고 바그너는 '내시'니 '고자'니 하는 독설을 퍼부었는데, 하필 이 두 사람이 모두 한 여인을 사랑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그너와 브람스가 함께 사랑한 여인은 베젠동크 부인이었다 이 여인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각자 자신 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전하며 경쟁을 했지만 결국은 무위로 끝났고, 또 하나의 상처가 각각의 가슴에 남았던 것이다. 숱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가슴에 안을 수 없었던 브람스는 고독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모두 가슴에 안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했던 바그너 역시 그의 삶에서는 실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토록 치열했던 음악 혼은 설혹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지언정 결코 실패였다고는 그 아무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by opimous | 2009/02/06 22:20 | Classical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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